DAY-10 예배의 중심 > 목적이 이끄는 삶

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DAY-10 예배의 중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진주갈릴리교회
댓글 0건 조회 628회 작성일 21-07-14 13:55

본문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3)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진정한 헌신은 하나님께 아주 큰 기쁨이다.
그러나 ‘나를 드린다’는 개념은 우리에게 쉽게 마음에 다가오진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거부감이 생겨난다. 나를 드린다는 것은 어찌보면 항복이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의 경쟁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는 노력을 멈추지 말고, 절대 포기하지말고, 절대 항복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런 우리에게 항복하고 나를 바치라니.. 결코 쉽게 용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정복을 더 좋아한다. 승리와 성공을 더 좋아한다. 그렇지만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바로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항복하는 것,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헌신’이라는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내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모습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우리안의 거부감을 누르고 나를 ‘헌신’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삶을 드리기 위해선 우리 안에 방해적인 요소를 잡아야 한다.
그것은 ‘두려움’ 이며, ‘교만’이고, ‘혼란’이다.

1) 우리는 ‘헌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항복’ 이란 좋지 못한 것으로 듣고 자랐다.
우리 안에는 나 자신을 드린다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고, 실제로 내 맘대로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또 다른 어떤 것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두려워 한다.
그렇지만 이 두려움은 정복될 수 있다.  ‘알아감’을 통해서 말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나를 맡길 수 없다. 불확실함 속에 자신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을 믿으면 나를 던질 수 있다. 더욱이 상대방을 알아감으로 더욱 우리의 신뢰는 커져간다.
헌신이 되기 위해선 우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우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는 것은 쉬워진다.
우리에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다(시145:9 ) -우리에게 눈을 떼지 않으신다(시139:3)
-우리의 작은 부분까지 돌보신다(마10:30)  -기쁨을 느끼도록 능력을 주신다(딤전6:17)
-우리의 삶을 위한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신다.(렘29;11)
-우리를 용서하신다(시86:5)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시145:8)
가장 극적인 사랑의 표현은 역시 십자가이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내가 나를 그분께 드렸을 때에 그는 나의 폭군이 아니라 구세주라는 것을, 상사가 아니라 형제라는 것을,
독재자가 아니라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교만을 잡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 자체를 굉장한 대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다스리는 존재지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을 피라밋의 꼭지점에 놓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참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유혹이다.
“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 (창3:5)

삶은 싸움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야곱처럼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도권의 싸움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의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만이다.
이 교만은 반드시 꺽어져야 한다.
소크라 테스의 말을 기억하는가? “ 너 자신을 알라 ”
교만이 꺽여지기 위해선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필요한다.
주관적으로 상상한 나와 만나지 말고, 객관적인 나와 만나라.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하나님 없는 나 자신이 어떻게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나를 바르게 볼 수 있다면 나의 교만은 꺽어질 것이다.

3) 헌신의 의미 찾기
헌신이라는 것은 수동적으로 단념하는 행동이나 게으름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헌신이란 반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삶을 희생하기 위해서,
또는 변화되야 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로봇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내 의지로서 고백되어지는 헌신의 고백을 원하셨다.
기억하라.
- 헌신은 나와 싸워야 한다.
- 헌신은 나를 나답게 하며,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
- 헌신의 현장은 삶이다. 예) 베드로의 헌신
“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며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는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5:5)
내 현장이 살아야 한다.
사람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일에 대해서 나의 삶에 헌신의 증표가 있어야 한다.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마6:24)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

※ 헌신은 내 삶을 축복한다.
- 우리는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 (욥22:21)
- 우리는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었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롬6:17-18)
-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헌신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한다. 생각해보라.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예) 여호수아, 마리아
하나님께서 책임지는 존재가 될 때에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된다.

※ 헌신을 계속 고백하라.
항복을 고백하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항복의 삶은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하고 평생 해야 하는 것이다.
산제물의 문제는 그것이 제단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은 매일의 습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 만약 나를 따르려 한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나를 따르기 위해 매일매일 자신들의 삶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 (눅9:23 NCV)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